연예인 이래도 유교가 억제기가 아니라고?[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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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쿠로 댓글 0건 조회 117회 작성일 24-05-09 0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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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유학의 이미지는 그다지 좋은 편이 아니다.



심지어 9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이 나라가 이 꼴이 된 게 다 유교 때문이다!' 라며


유교망국론이 널리 퍼져 있었을 정도였다.



hq720 (1).jpg 이래도 유교가 억제기가 아니라고?


지금도 일반인들이 바라보는 유학에 대한 이미지는


'예의에 집착하고 서열에 집착하는 수구꼴통 꼰대들' 이 매우 강하다.



심지어 '유교가 자유로운 토론을 막는 바람에 발전이 정체되었다.' 라며


유학은 진보를 가로막는 억제기이기에


유학을 뿌리뽑아야 한다는 극단적인 주장을


많은 사람들이 지지할 정도다.



content.jpg 이래도 유교가 억제기가 아니라고?


실제로 중국에서는 유학을 '봉건주의의 잔재' 라며


유학을 때려잡자는 캠페인을 벌인 적이 있었을 정도고


6901650708_486263_838a40b78aaf4071b3f848f38158629f.jpg 이래도 유교가 억제기가 아니라고?


문화대혁명 당시 공자의 무덤이었던 공묘는 홍위병들의 표적이 되어 파괴되었다.


6901650708_486263_e087dcf6fe52fea85b0cd3d746d77a69.jpg 이래도 유교가 억제기가 아니라고?



그런데 도대체 유학은 어떠한 내용을 담고 있길래


지난 세기 이렇게 극단적인 공격을 받아야 했을까?



사실, 유학은 사상가마다, 시대마다 어느 정도 차이가 있기에


'이게 바로 유학이다' 라고 명확하게 정의내리기는 힘들다.



GettyImages-464739911-de579bc85e7a4fc7a3ca98270ac9a519.jpg 이래도 유교가 억제기가 아니라고?


하지만, 유학에서 대성인으로 추앙받는 공자의 사상을 살펴보면


유학의 본질이 무엇인지 짐작해볼 수 있다.



비록 공자의 경우 자신의 사상을 따로 책으로 내지 않아서


공자 사후 제자들이 기억에 따라 재구성한 '논어' 를 제외하면


공자에 대한 언행을 살펴볼 수 있는 자료가 거의 없는 상황인데,


논어의 경우 유학을 이미 어느정도 알고 있지 않으면 이해하기 힘든 상황이다.



반면, 공자 이후에 활동했던 맹자의 경우


상당해 명쾌한 문체로 여러가지 이야기들을 적어 놓았는데,


그 중 '공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라며 다음과 같은 내용을 적어두고 있다.



1715170690.jpg 이래도 유교가 억제기가 아니라고?



이 구절만 보면 많이 당혹스러울 것이다.


이른바 '인류 4대 성인' 으로 일컫어지는 공자가


고작 인형을 만들었다는 이유만으로


인형 제작자에게 자손이 끊기라고 저주를 했다는 게 황당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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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런 배경지식 없이 읽으면 예수가 무화과 나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저주한 것 마냥

인성이 의심되는 소리로 보일 수 있을텐데,


나는 이 구절이야말로 공자의 사상을 잘 함축한 구절이라고 생각한다.


1715170886.png 이래도 유교가 억제기가 아니라고?


왜냐하면 저 '인형' 이라는 게


순장 문화에서 유래된 것이기 때문이다.



1715170947.jpg 이래도 유교가 억제기가 아니라고?


고대 중국에서는


유력자가 죽으면 아랫사람들도 같이 죽어야 하는


순장 풍습이 있었는데,



공자 시절에 가면


중국이 갈기갈기 찢어져서 서로 치고 박고 싸우느라


어지간해선 죽은 사람을 위해 산 사람을 같이 묻기가 어려워져서


사람 대신 저기서 말한 '인형' 을 대신 매장하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공자는 이렇게 인형이라도 대신 묻는 풍습이 남아 있다면


언제든지 사람 목숨을 개 돼지 마냥 가볍게 여기게 될 여지를 준다면서


이런 풍습조차 극도로 저주했던 것이다.



실제로 고대 중국은 동물의 왕국이라는 표현조차


동물들에게 명예훼손으로 고소당해도 할 말이 없을 정도로



훗날 코르테즈가 기겁하고 토벌했던 아즈텍과 비견될 수준으로


'사람이 이런 짓을 벌일 수 있다니' 싶을 정도로 잔학한 곳이었다.



공자가 살던 시대는 주나라가 명목상으로만 남은 춘추시대였는데,


주나라 이전에 세워졌던 상나라에서는


사람을 아무렇지도 않게 학살하고 고어물을 찍는 게 일상이었다.



1715171337.jpg 이래도 유교가 억제기가 아니라고?

당시 갑골문 보면


'제사 약빨이 없는 거 보니까 주술사를 태워버리자!'


'제물로 잡은 포로를 어떻게 죽이면 될까?'


이런 식으로 인신공양에 관한 내용이 태반일 지경이었다.



당시 고대 중국이 얼마나 야만적인 시대였는지는


그 시절 만들어진 한자들의 유래를 보면 알 수 있는데,


가령 백성을 뜻하는 '민民' 이라는 한자는


잡아온 노예들이 반항하지 못하도록


한쪽 눈을 멀게 만든 모습에서 유래된 한자였다.



1715171449.png 이래도 유교가 억제기가 아니라고?


실제로 이 시절에는 윤리 의식이라는 것도 희박해서


사람의 뼈로 그릇을 만들고


사람을 삶아서 제사를 지내는 모습이 자연스러운 상황이었다.



아예 상나라 말기에 가면


포락지형이라고 숯불 구덩이 위에 기름친 기둥을 올려놓고


사람을 지나가게 해놓고 떨어져 타죽는 걸 단지 흥미거리로 시행했을 정도로


인명경시 풍조가 하늘을 찔렀을 정도다.



1715171587.jpg 이래도 유교가 억제기가 아니라고?


상나라는 이러한 잔학함 때문에 멸망했다.


상나라 왕이 여흥삼아 주나라 문왕의 아들 백읍고를 죽여놓고선


그 고기로 죽을 만들어 주나라 문왕에게 먹였었는데,



이 일로 원한을 가진 주나라 문왕이 이를 갈다가


아들 주무왕 대에 상나라를 멸망시켰기 때문이다.



그리고 주나라는 상나라의 잔학함을 반면교사 삼아서


상대적으로 온건한 정치를 펼쳤다고 하지만,


근본적인 변화는 없었다.



오히려 수백년이 지난 공자 시절에도


중국은 피비린내가 물씬 나던 상황이었다.



공자가 살던 산동 지역의 제나라 환공은


춘추 시대 최초의 패자로 이름이 높았는데



1715171826.jpg 이래도 유교가 억제기가 아니라고?


제나라 환공의 비위를 사기 위해서


역아라는 자가 자기 아들을 요리해서 제환공에게 대접했는데,


제환공은 그걸 먹어보고는 맛있다고 측근으로 삼았을 정도였다.


1715172324.jpg 이래도 유교가 억제기가 아니라고?



그리고 펨코에도 잊을만 하면 '공자 점마 인육 좋아하지 않았나?' 라는


소리가 간간히 올라오던데,


1715172382.jpg 이래도 유교가 억제기가 아니라고?

이 소리가 나오게 된 게


공자의 제자 자로가 젓갈이 되었기 때문이다.



자로는 공자가 아끼는 제자로


공자에게 배운 데로 정치를 하다가 정치 싸움에서 패배하게 되었는데,



오늘날이면 정치 다툼에서 패배하면 적당히 한직으로 보내버렸겠지만


당시 중국은 사람 목숨을 파리 목숨처럼 여기던 시절이었기에


정치 싸움에서 패배한 자로를 본보기로 젓갈로 담그어버렸다.



당시 자로를 젓갈로 담그어버린 이들은 자로를 먹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에게 도전하면 니들도 이꼴 나니 현명한 판단 해라' 라고


잔혹한 모습을 보여주어 백성들에게 공포감을 심어주기 위해 이렇게 한 것이었다.




그리고 나서 이후 공자가 즐겨 먹던 젓갈을


다시는 입에 대지 못했다는 기록을 가지고,



'당시에는 젓갈을 사람으로 만들었었고,


예전에 젓갈을 즐겨 먹었던 공자는 식인종 아니냐' 라는 게


공자 인육설의 탄생 배경인데,



자기가 아끼는 제자가 젓갈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 이후에 젓갈만 보면 자로가 당했던 트라우마 때문에


젓갈을 먹지 못했다는 게 당연한 반응이 아닌가?


당시에도 젓갈은 해산물로 만든 요리였다.



오히려 이 이야기에서 알 수 있는 것은


공자가 인육을 먹었다는 내용이 아니라


그 시절 중국이 이 정도로 잔학한 곳이었다는 점이다.



그렇기에 공자가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고자


'사람 목숨이 귀하고, 질서가 중요하다' 라고 강조했던 것이다.



물론, 공자가 살던 시절


공자의 가르침은 지배층에게 널리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오히려 지배층들은 나라를 부강하게 만드는 법가의 이론을 좋아했다.



실제로 맹자 양혜왕편을 보면


양혜왕이 '너는 어떤 이익을 가져다 줄 수 있느냐' 라고 대놓고 물어볼 정도였다.


그래서 춘추전국시대에도 소름끼칠 정도로 잔학한 일화가 많았다.



진晉 나라 조양자 일화를 보면


식인이 일상이고 정적을 죽여서 두개골을 술잔으로 만들어버린 이야기가 나올 정도였다.



게다가 전국 시대의 시작을 알린 진晉 나라의 멸망을 보면


신하들이 진나라 왕을 무시하고 나라를 나눠먹었을 정도다.


자기 위에 있는 사람조차 힘이 없으면 바로 쳐내던 시절이라


도덕과 윤리라는 개념 자체가 없던 시절이었다.



괜히 공자가 '君君臣臣 父父子子' 라며


'군주는 군주답게, 신하는 신하답게, 아버지는 아버지답게, 아들은 아들답게' 라고


질서를 강조했던 게 아니다.



심지어 전국시대 말기에 가면


진秦나라가 장평대전에서 조趙나라를 궤멸시키고


포로로 사로잡은 숫자가 40만명에 달했는데



진秦나라가 '포로 먹여 살릴 능력도 없고 쟤네들 관리하기 힘들다' 라면서


40만명에 이르는 이들을 몽땅 생매장해버렸을 정도였다.


오늘날 해당 지역에 가면 유골들로 형성된 지층이 있는 상황이다.



1715173683.jpg 이래도 유교가 억제기가 아니라고?



게다가 진秦나라를 멸망시킨 항우도


똑같이 '먹여살리기도 힘들고, 관리하기도 힘들다' 라며


20만명의 진秦나라 병사들을 같은 이유에서 학살해 버렸을 정도로


잔학한 일이 대물림되던 상황이었다.


1715173780.jpg 이래도 유교가 억제기가 아니라고?


그나마 한나라 이후 국가적으로 유학을 장려하니까


한나라 이후에는 저런 미친 짓들이 대규모로 나오지 않았을 뿐이었다.



하지만 모택동이 중국을 공산주의에 물들이고


'공자가 중국을 망쳤다!' 라면서 유학을 적폐로 몰아붙이고


문화대혁명을 일으켜서 중국 사회에서 유학의 잔재들을 '타파' 하자


유학의 보급 이후 내면에 숨어 있던 잔인함이 튀어나왔다.


1715174037.jpg 이래도 유교가 억제기가 아니라고?

광시성 산골짜기 마을 다섯 곳에서조차 저런 일이 벌어졌는데


중국 전체로는 얼마나 많은 끔찍한 일들이 있었을지는 상상에 맡기려 한다.




이처럼 유학은 동아시아권을 예의와 질서에 집착하게 만들어서


사회의 발전을 저해한 측면이 있을지 몰라도



최소한 중국에서는 공자가 매우 필요한 사람이었다.


공자가 살던 시절 중국은 아즈텍이 호형호제할 만큼 잔학한 곳이었고


유학의 보급으로 인해 이러한 모습이 사그라들었다는 점에서



만일 유학이 이러한 잔인한 모습을 억제하지 않았더라면


중국은 혼란스러울 때마다 아즈텍마냥 인육파티가 벌어졌을 것이고


오늘날 중국은 차라리 남미가 안전하게 느껴질 정도로 생지옥이 되었을 것이라는 점에서



유학은 이러한 잔학한 모습을 제어하는 '억제기' 라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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